그러자 비구니가 말했습니다.
‘내 너를 위해 머리 뒤를 열고 비수를 숨겨 줄 것인데, 아무런 상처도 없을 것이다. 사용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뽑으면 된다.’
그리고 비구니가 말했습니다.
‘너의 술법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되느니라.’
그러곤 돌려보내며 ‘20년 후에 한 번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ㅡ 82쪽, <섭은낭> 편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무협지 좀 읽은 사람. 오늘 소개하는 책은 ‘무협’의 조상님이시다. 바로 <<검협전(劍俠傳)>>(지만지, 2014) . 당송시기 여기저기 실려 있던 전기(傳奇) 소설 33편을 골라 엮었다. 무협소설의 극적 구성과 캐릭터의 맹아가 이 책에 다 있다. 읽다보면 요즘 무협지의 시놉시스나 캐릭터를 모아 놓은 느낌이 들 정도다. 고전같지 않은 고전이라고나 할까. 저자? 모른다. 설만 분분하다.

섭은낭

섭은낭구(聶隱娘九) “정정공공, 의쉬경종(精精空空, 宜淬鏡終)”은 “정정(精精)과 공공(空空)을 죽였고, 거울 가는 사람에게 시집갔네”라는 뜻이다.

위에 소개한 이야기는 <<검협전>>에 소개된 33개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이야기다. 은낭은 어렸을 때 비구니 스승을 만나 신비한 약을 먹고 무술에 통달하게 된다. 암살자로 살다, 왠지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시작이다. 역시 수없이 많은 유사 응용 이야기의 씨앗이 되었다.

<<검협전>>은 한 해를 보내고 맞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요즘, 잠시 긴장을 풀고 쉬어가자고 고른 책이다. 인간에게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가 무협과 로맨스라고 하지 않던가. 막힌 속을 뻥 뚫어줄 호쾌 통쾌 황당한 이야기의 향연이다. 제일 유명한 이야기 하나 더.

술잔이 돌자 나그네가 말했다.
“내게 술안주가 조금 있는데, 이랑이 같이 드실 수 있겠소?”
이정이 말했다.
“감히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나그네는 가죽 주머니를 열고 사람 머리 하나와 심장, 간을 꺼냈다. 그러고는 머리는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비수로 심장과 간을 썰어서 함께 먹으며 말했다.
“이 사람은 천하의 배신자인데, 10년을 뒤쫓아 따라다니다 이제야 비로소 놈을 잡게 되어서 나의 한도 풀게 되었소.”
19쪽 <부여국왕>  편

 

규염객

규염객이(虯髥客二) “부심가최, 비공세계(負心可嘬, 非公世界)”는 “배신자를 썰어 먹으나, 이 세상은 공의 세상이 아니오”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는 <부여국왕> 편이다. <규염객전>으로 더 알려져 있다. 긴 머리 미녀, 패기 있는 젋은 협객, 때를 만나지 못한 얼굴이 붉은 영웅이 나온다. 이 붉은 영웅은 나라를 옮겨 ‘왕’의 꿈을 이룬다.

<<검협전>>에서 눈에 띈 몇 구절을 더 소개하겠다.

시승(詩僧)인 제기(齊己) 가 위산(潙山) 의 숲에서 한 승려를 직접 만났는데, 엄지손톱 아래에서 검 두 자루를 뽑아내고는 솟구쳐 허공으로 뛰어올라 가 버렸다고 했다.
ㅡ 148쪽, <허적> 편

이런 구절을 읽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무협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않은가. 그게 판타지의 힘일 것이다. 현실에서 불가능하지만 상상속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한 것. 그러고 보니 겨우 두 자루가 뭔가. 칼 스무 자루, 이백 자루는 못 뽑겠나!

“이는 사소한 일일 따름인데, 어찌 일찍 말씀해 주지 않으시고, 혼자서 괴로워하셨습니까?”
ㅡ131쪽, <곤륜노> 편

한눈에 반한 기녀때문에 고민하는 최생에게 노비 마륵이 한 말이다. <<검협전>>에서는 주인공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협객이 나타나 항상 이렇게 말한다. ‘사소한 일’일 뿐이라고. 지금 내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이어서인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세요. 제가 우연히 친구들과 장난을 쳤습니다. 그런데 결국 되돌려 주려고 했지만, 꾸물거리다 여가가 없었습니다. 외삼촌께서는 이른 아침에 자은사(慈恩寺) 의 탑원(塔院)에서 참고 기다리시면,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 이곳에 염주를 가져올 것입니다.”
ㅡ159쪽, <반장군> 편

1년에 걸쳐 전 군대와 사람을 풀어 찾았던 염주를 이렇게 간단하게 찾는다. 협객이 지정하는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된다. 고민할 것도 아니고 노력할 것도 아니고, 귀인을 만나야 일이 해결된다.

우당탕탕 달려온 2014년이 갔고 2015년이 왔다. 2014년을 채운 가장 큰 감정은 ‘슬픔’인 것 같다. 세월호만큼 큰 충격을 준 사건은 아직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미디어토핑을 만나고 듣보잡 고전을 시작했다.

유난히 생각이 많은 연말연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합당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공짜는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고민이나 어려움이 모두 내가 성실하게 댓가를 치르는 과정이다. 조금이라도 몸을 사리지 않고 충분히 댓가를 치를 수 있길 스스로에게 바랄 뿐이다.

그동안 글을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한다.
2015년엔 꼭 귀인을 만나 ‘사소한 일’ 모두 잘 풀리는 한 해가 되길 빌겠다.
갑자기 이런 인사를 하다니, 이제 듣보잡 고전 안 쓰냐고? 2015년에도 해가 뜨고 달이 질텐데, 달라지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일상은 계속된다.

bacon About bacon
베이컨은 돼지 옆구리살이다. 베이컨의 품질은 지방질이 좌우한다. 옆구리살의 지방은 게으름이나 여유가 몸에 물질화한 거다. 문화도 여유에서 나왔다. 베이컨은 내 생각의 지방, 나란 돼지의 옆구리살을 저며내어 산업사회가 준 기술과 향신료에 버무린 고기다. 팍팍한 나를 풍요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먹을거리다. 아무 토핑이나 얹고 깔고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