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별지의 구전은 노의 길에 종사하는 우리 간제(觀世) 집안의 비급이며 한 세대 동안 단 한 사람에게만 전해야 할 비전이다. 설령 친자식이라 하더라도 그릇이 못 되는 자에게는 이 비전을 전해서는 아니 된다. – 147쪽, 발문

책의 곳곳에 쓰여 있는 다짐이고 당부다. 어? 자식이 그릇이 안 되면 그릇을 만들기 위해 머리에 스트레스성 탈모로 구멍을 뚫어주는 게 요즘 유행 아니었던가? 자식 몇 명에게 더 많은 유산을 남겨주기 위해 사회 인프라도 사유화 하는 세상에, 도대체 이 책의 저자는 뭐길래?

≪풍자화전(風姿花傳)≫의 각 내용들은 남들에게 보이길 원치 않으며, 나의 후손만의 가훈(家訓)으로 삼을 것을 주된 목적으로 적어 남기는 것이다.
– 91쪽, 제5편 오의

일본 전통극 ‘노(能)’를 대성한 제아미(世阿彌)가 남긴 가문의 비급이 ≪풍자화전≫이다. 1418년에 발문을 썼으니, 600년 전에 쓰인 책이다. 저자 제아미의 지시대로 이 비급은 가문 내에서만 극비로 내려왔기에 일반인들에겐 전설 그 자체였다. 에도 시대엔 가짜가 나돌았을 정도. 1908년에 이르러서야 발견되어 엄청난 관심을 모았고, 지금 우리도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었다. 지만지에서 제대로 번역한 완역본이 2008년에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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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제아미는 출중한 외모와 실력으로 당대를 풍미한 노의 작가이며 연출가, 배우다. 풍자화전(風姿花傳)에서 ‘풍자(風姿)’라는 말은 ‘예술적으로 표현된 연기의 모습’이라는 뜻이고 , 화전(花傳)이란 “예술적 매력을 꽃피우기 위해 연기자가 알아야 할 비결을 써서 전한다’는뜻이다. 몇 년 전 김제동이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 나와 ‘내 인생의 책’으로 이 책을 꼽았다는 걸 알고 김제동을 다시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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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김제동의 서재>

이 책은 예술의 길을 걷는 사람에 대한 갖가지 조언을 담고 있다. 특히 올바른 ‘수련의 태도’를 강조한다(옛날이나 지금이나 중요한 건 역시 태도). 나이별로 적합한 수련 방식이나 노의 각 역할별 연기 특징과 주의할 점도 상세하게 설명한다. ‘노’ 배우를 위한 종합 가이드북이며 이론서지만, 예술가를 위한 수련서로서 충분히 널리 읽힐 만 하고 실제 읽히고 있다.

좋고 나쁨을 너무 세세히 지적하며 가르치려 드는 것은 좋지 않다. 너무 엄하게 주의를 주면 아이들은 의욕을 잃고 싫증을 내고 말 것이다. –(중략)– 수준 있는 연기 따위는 설령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가르쳐서는 안 된다.
ㅡ 7쪽, 제1편 각 연령에 따른 수련법의 갖가지, 7세

소년기의 ‘꽃’은 진정한 의미의 꽃은 아니다. 그저 연령에 의해 일시적으로 핀 꽃이다. 이러한 천부적인 꽃을 갖추고 있기에 이 시기의 수련은 모든 것이 쉽게 느껴진다. 그러하므로, 이 시기에 보이는 재능으로 그 아이가 장래에 성취하게 될 수준을 판정할 수는 없겠다.
ㅡ 10쪽, 제1편 각 연령에 따른 수련법의 갖가지, 십이삼 세

무릇 이 오니의 연기에는 커다란 어려움이 있다. 연기를 잘하면 잘할수록 재미가 없어진다는 딜레마가 그것이다. 무섭다는 것이 오니의 본질이며, 무섭다는 것과 재미있다는 것은 정반대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ㅡ 40쪽, 제2편 연기 수련법 갖가지, 오니

풍자화전에서도 그렇고 제아미는 “꽃”이란 말을 자주 한다. “꽃”은  제아미가 필생의 과제로 삼았던 개념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노 이론서의 제목에 이를 뜻하는 ‘화(花)’ 자가 들어 있다. 그 뜻을 풀이하자면, ‘무대 위에서 연기자가 관객들에게 보이는 연기적 매력’쯤 되겠다.

꽃과 재미와 진기함, 이 세 가지는 서로 같은 개념이다. 세상에 지지 않고 남는 꽃이 어디 있는가. 지는 탓에, 다시 필 무렵이 되면 진기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ㅡ 125쪽

노의 가장 유명한 레퍼토리 중 하나인 <이즈쓰井筒>, 제아미의 작품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열심히 수련하고, 경쟁자와 경쟁하고, 그래서 성공하기도 하고 성공하지 못하기도 한다. 예술가를 위한 수련서지만, 보통 사람에게도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

나이 든 고참 배우가 예술적 꽃을 잃고 시들해져 있는 틈을 타, 젊은 배우가 젊었을 동안에 잠시 갖추게 되는 신선한 일시적 꽃으로 이길 경우가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안목이 있는 관객은 이를 간파한다.
ㅡ 55쪽, 제3편 문답 갖가지, 젊은 배우의 꽃과 고참 배우의 꽃

본인 생각에는 상당한 꽃을 갖추었다 여기더라도, 그것을 관객들의 눈에 보이게끔 하는 궁리가 없다면, 봐 주는 이 없는 촌구석 꽃이나 덤불 속의 매화처럼 헛되이 피어 있는 것이나 진배없다.
ㅡ 56쪽, 제3편 문답 갖가지, 젊은 배우의 꽃과 고참 배우의 꽃

요즘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내 직장 생활에 비추어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마침 연말이고 인사고과를 매기고 평가하는 시즌이라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평가 자료를 준비하면서 2014년 한 해를 돌아보면, 평소의 습관대로 한 일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습관대로 하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지.

≪풍자화전(風姿花傳)≫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이 뜨끔했던 부분이 ‘노를 아는 것’이란 꼭지다. 지금의 내 생각과 겹쳐져 더욱 깊이 다가왔을 것이다. ‘노’ 대신 내 일의 이름을 넣어보자. 예를 들면, ‘경영’을 아는 것, ‘미디어’를 아는 것, ‘출판’을 아는 것, ‘방송’을 아는 것, ‘인터넷’을 아는 것.

귀인의 앞에서나 큰 무대에서 상수이면서도 실수를 해 실력 발휘를 다 못하고 마는 것은 노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량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고 연기 가능한 레퍼토리도 많지 않은 소위 초심자급이 큰 무대에서 꽃을 피우고 관객들의 갈채를 받아 별 흠잡을 데 없이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기량 이상으로 노를 제대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 부류의 연기자를 두고 어느 쪽이 나은지에 관해 사람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귀인의 앞에서나 큰 무대 등에서 늘 성과를 내는 연기자는 그 명성이 오래 갈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본다면, 상수이면서 기량에 비해 자신의 노를 잘 알고 있지 못한 자보다는 기량은 다소 처지더라도 노를 알고 있는 자 쪽이 장차 노 극단을 이끌 동량의 재목으로서는 낫지 않을까 싶다.
ㅡ 121쪽, 제6편 꽃을 체득하는 비결, 노를 아는 것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일을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할 수 있다고, 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제아미가 말한 것처럼, ‘기량은 다소 처지더라도 노를 알고 있는 자 쪽이 장차 노 극단을 이끌 동량의 재목’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데 공감한다. 그리고 난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안다. 스스로를 돌아보면 기량은 조금 갖추었으나 공부가 부족하다. 그래서 이 자각이 아프다.

어지간히 득달한 상수·명인이라 하더라도, 앞에서 얘기한 꽃에 대한 공부나 연구가 되어 있지 않은 배우는, 상수 소리는 들을지언정 예술적 꽃은 그리 오래 간직할 수가 없다. 그와 반대로, 그 꽃에 대한 공부나 연구를 제대로 한 상수는, 설령 기예에 있어 퇴보를 보인다 하더라도, 그 예술적 꽃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ㅡ 57쪽, 제3편 문답 갖가지, 젊은 배우의 꽃과 고참 배우의 꽃

되돌아보면, 나도 가끔 내 인생의 ‘꽃’을 피운 적이 있다. 거의 누구나 꽃을 피워본 적이 있을 것이다. 꽃은 피고나서 반드시 시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꽃일 게다. 제아미의 조언대로라면 내 나이는 후배를 키우는 데 집중할 시기지만, 수명이 많이 늘었으니 아직은 전성기라 불러도 될 것 같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기량을 연마하고 공부와 연구에 진력해야 하는 시기란 뜻이다. 기량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쌓이는 게 있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 습관대로 살면 기량은 쌓이되 공부가 부족해지는 거다. 잠시 우울해졌다가, 다음과 같은 제아미의 말에 다시 희망을 붙잡는다.

그렇긴 하나, 앞에서와 같은 두 부류 중 어느 쪽이 나은지에 관해서는 사람들마다 제각기 의견이 다를 수 있으므로 각자의 판단에 맡겨 우열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
ㅡ 122쪽, 제6편 꽃을 체득하는 비결, 노를 아는 것

≪풍자화전(風姿花傳)≫ 소개 뉴스레터 이미지, 지만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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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은 돼지 옆구리살이다. 베이컨의 품질은 지방질이 좌우한다. 옆구리살의 지방은 게으름이나 여유가 몸에 물질화한 거다. 문화도 여유에서 나왔다. 베이컨은 내 생각의 지방, 나란 돼지의 옆구리살을 저며내어 산업사회가 준 기술과 향신료에 버무린 고기다. 팍팍한 나를 풍요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먹을거리다. 아무 토핑이나 얹고 깔고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