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_moreasigye이미지 =  http://itviewpoint.com/blog/66757

1995년 1월 방송된 드라마 <모래시계>는 흥행 대작이었다. 이미 <여명의 눈동자>에서 최고의 조합임을 입증했던 김종학PD, 송지나 작가에 최민수, 고현정, 박상원, 이정재 등 선 굵은 연기자들이 더해지며 우리 현대사를 맛깔스럽게 다룬 이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이 무려 50.8%였고 ‘최고’ 시청률은 무려 64.3%를 기록한다. 점유율이 아닌 시청률이다. 한 동네에 100 집이 있다면 이 중 64.3 집이 TV 앞에 앉아 <모래시계>를 봤다는 의미다. 실로 어마어마한 현상이었다. 이런 시청패턴을 보이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서둘러 귀가해야 했고 그래서 이 드라마의 별명 중 하나가 <귀가시계>였다. 방송시간 중에는 길거리가 한산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TV 드라마를 보기 위해 집에 서둘러 들어가고 방송시간에는 아무도 안 돌아다녔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래시계>가 기념품이나 목욕탕 사우나에 있는 것으로 아는 새로운 세대는 TV 방송 보자고 일정을 바꾸거나 뛰는 일이 결코 없다. 왜?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TV 앞에 제 시간에 가 앉아 있지 않아도 볼 방법이 많고 그것도 안 되면 나중에 “찾아 보면” 되기 때문이다.스포츠처럼 실시간으로 봐야 제 맛인 방송이라 해도 DMB도 있고 티빙이나 푹도 있다. 또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공짜로 스트리밍 방송을 제공해주는 앱을 찾아낼 수도 있다. Youtube나 아프리카TV에서 생중계를 할지도 모른다. 맘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콘텐츠를 보고 즐길 수 있는데 왜 서둘러 귀가한단 말인가? 나머지는 나중에 찾아 보면 된다. IPTV나 홈초이스와 같은 TV용 서비스도 있고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모바일 동영상 서비스도 있지만 단연 편한 것은 웹하드나 토렌트다. 어쩌면 밴드나 카톡방에 물어보면 친구들이 링크를 보내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TV 좀 보자고 집에 일찍 들어간단 말인가? 집돌이, 테돌이야?

TV_extention

필요는 발명을 낳는다고 했던가? TV가 보급되고 우리 삶에 “또 하나의 가족”으로 자리잡고 나자(보통 가정의 거실에서 TV가 사라진다고 상상해보자. 한 쪽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식구 중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한 쪽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자세가 우스꽝스럽지 않을까?) 점점 TV를 ‘편하게’ 보고 싶어하는 욕망이 싹텄다. 그 욕망에 따라 TV방송(프로그램, 콘텐츠)을 TV를 떠나서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겨났다.

먼저 공간의 자유를 추구했다. 아래 제품들은 실제 국내에서 100만 대 이상 팔렸던 포터블 TV다. 비록 안테나를 길게 뽑아야 했고 조금만 자세를 바꿔도 고스트가 생기곤 했지만 요즘 표현으로 “쩌는”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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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 (위) http://www.pinterest.com/pin/8233211793265398
(아래) http://www.amazon.com/Casio-TV-880-Portable-Handheld-Color/dp/B00005EBGN

이후 방송이 디지털로 전환되면서 이동수신시장을 고려하게 되었고 유럽의 DVB-T처럼 제 스스로 이동수신을 보장하는 방식이 도입되거나 미국의 ATSC처럼 별도의 이동수신목적의 방송 서비스(DMB)가 등장하게 된다. 방송에서만 TV 혁명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무선 통신의 전송능력이 방송을 뛰어넘으면서 기존 방송보다 훨씬 빠른 진화속도로 TV의 공간파괴형 혁신 서비스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제 LTE 네트워크로 무장한 각 통신사의 모바일 영상서비스는 600만 이상의 가입자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그만큼 TV가 거기에 있다는 이유로 집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졌다.

DMB

 이미지 = http://www.treport.co.kr/go/13099

TV 혁명은 공간파괴에 그치지 않았다. 도저히 제 시간에 시청할 수 없거나 너무나 좋아서 또 보고 싶은 사람들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를 원했다. VCR이 등장했고 예약녹화서비스처럼 편성표를 기반으로 한 서비스 고도화가 이루어졌다.(G코드라고 기억하시는가?) 그러다 아예 디지털 파일로 녹화해서 화질 보장은 물론이고 건너 뛰기나 공유가 편하게 하는 PVR 계열 저장장치 역시 지속적으로 관심 대상이었다.

VCR2  dstv-hd-pvr-2p이미지 = (위) http://www.nosolohd.com/xf/threads/tecnolog%C3%ADa-del-vhs.4133/
(아래) http://www.channel24.co.za/TV/News/Dstv-decoder-reboot-coming-20140124

그러나 이런 개인형 녹화 서비스는 TV 혁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한 마디로 ‘귀찮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녹화할 것인지미리 미리 정하고 부지런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TV의 실시간 채널 편성에 따른 소비패턴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소비자의 귀찮음과 불편이 플랫폼 사업자에게는 비즈니스 기회가 되었다. 특히 디지털로 출발한 플랫폼들은 녹화의 귀찮음을 해결해주며 TV에 대한 시간파괴 혁명을 이끌었다. 그렇게 ‘다시 보기’ 서비스는 IPTV의 성공요소였고 경쟁 플랫폼들 역시 유사한 서비스를 내놓으며 TV의 시간파괴는 점점 보편화되어가고 있다.

SKB이미지 = http://blog.skbroadband.com/920

 TV 혁명이 불러 온 시장변화

이렇게 TV(프로그램, 콘텐츠)를 ‘TV로’ ‘제 시간에’ 봐야 했던 것에서 벗어나 어느 곳에서나 내가 원하는 때 볼 수 있게 되자 시장 내 역학관계가 바뀌었다. 기존의 TV 방송사업자의 경우 자신이 정한 방식대로 소비되던 시장이 시청자(이용자)가 선택하는 시장으로 바뀌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당황만 할 뿐 변화를 막거나 늦출 수는 없었다.)

TV 시청의 공간파괴에 대해서는 기대가 많았었다. TV를 보지 못하던 곳에서 TV를 본다는 것은 결국 시청자(이용자)의 확대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이런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광고주를 설득하고자 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설득이 유효해서 프로그램과 함께 광고도 그대로 제공되며 자시 시장을 유지하는 편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달랐다. 본격적인 첫번 째 공간파괴 서비스로 DMB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TV 시청자의 확대라는 주장이 광고주 설득에 실패하면서(기존 지상파만 DMB를 했다면 모를까 무조건 새로운 광고시장일 수 밖에 없었던 신규 사업자가 반이나 되었기에 TV의 공간확대로 자리매김 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광고는 TV와 다르게 편성되었다.) 콘텐츠 소비의 공간만 확대되고 수익은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최근 초고속 무선 인터넷과 빵빵한 디스플레이 그리고 편리한 이용방법으로 무장한 스마트 디바이스가 확산되며 오히려 TV 자체가 위협을 받기에 이른다. 이용자들이 이들 디바이스를 TV가 존재하는 공간에서까지 적극적으로 이용하거나 심지어 TV를 밀어내고 대신 사용하게 되어서다. TV 실시간 시청률은 급락하고 기존 방송사업자들은 TV의 공간파괴에 대해 공포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진짜 변화는 시간 파괴 서비스로부터 나왔다. 방송 끝나자마자 다시 볼 수 있는 다양한 서비스가 등장하면서 시청자(이용자)들은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공간파괴 서비스만 해도 최소한 머릿속에 편성표를 기억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시간 파괴 서비스가 보편화되자 편성표는 검색창으로 대체되었고 시청자(이용자)는 재미있을지 아닐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TV 앞에 앉아 자기 시간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방송이 끝나고 화제가 되거나 그 결과를 누군가 공유 링크로 걸어주면 그 때 봐도 충분했고 심지어 시리즈가 완결될 때까지 보지 않는 경우도 생겨났다.(방송에서는 이상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예전 만화책은 이렇게 보는 친구들이 많았다.) 또 방송 프로그램(콘텐츠)를 이용하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볼 필요도 없어졌다. 조금만 느슨해지면 뒤로 돌려보거나 다른 콘텐츠로 대체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광고라고 하는 전통적인 수익모델이 점차 무의미해졌고 콘텐츠 유통수익이라는 대안을 턱없이 부족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 방송사업자들이 속된 말로 ‘멘붕’에 빠졌다. 이에 대한 대응전략은 극과 극이다. 불법 유통을 막고 홀드백을 늘리고 콘텐츠 이용대가를 높이면서 기존 수익모델을 최대한 지켜보려는 곳도 있고 반대로 시간파괴형 서비스를 적극 활용해 시장을 지키려는 곳도 있다. (2014년 8월 Comcast는 실시간 방송과 VOD 서비스의 중간적 성격을 갖는 서비스를 실험했다. FX의 The Bridge 프로그램에 대해 본 방송 직후 다음 회차 방송을 Comcast의 VOD로 제공한 것이다. 4회를 보고 나면 5회를 VOD로 미리 볼 수 있게 한 공격적 전략은 사전제작방식이 가능하기에 성립되는 서비스며 OTT, DVR 등 미디어 다원화에 따른 유료 TV 시청 및 광고노출 감소를 극복하여 유료 TV 사업자의 주 수익원인 광고기반을 다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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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udentbeans.com/mag/en/news/the-lazy-person-s-guide-to-getting-a-job

 자유의 신장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방식으로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가니 총 이용량이 늘어날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 디지털화 과정에서 음악 콘텐츠는 이런 변화를 겪었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난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적어도 밤낮 없이 분주하고 재미있는 일이 가득한 우리나라에서는 TV 시청에 있어 자유의 증가는 TV 콘텐츠 총 소비량을 줄이는 결과를 낳을 것 같다.(먹고 살자면 아니길 바라고 바라야 하겠지만..)

내 주장은 이렇다. TV 앞에 가지 않아도 되고 꼭 그 때 볼 필요가 없으면 ‘아. 저거(그거) 재미있겠는데? 음.. 지금은 좀 바쁘니까.. 나중에 봐야지..’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시간이 정해져 있진 않다. SNS도 재미있고 게임도 재미있고 술자리도 많다. 설사 시간이 주어진다 해도 그 때 그거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얼마든지 많다. 결국 막연하게 미뤄둔 시청은 허공에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자유가 낭비를 낳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가설은 실제 이용자 데이터를 통해 검증되어야 할 것이지만 최소한 내가 들여다볼 수 있는 플랫폼에서는”영감 주려고 아끼던 홍시 똥 되었다”던 예전 할머니 말씀처럼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TV 시청방식이 공간과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나면 훨씬 더 많은 콘텐츠가 소비되며 전체 시장이 커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그 증거를 찾기 위해 통합시청률에 매달린다. 개인적으로 그 주장이 맞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분명 아직까지는 미디어 소비방식의 자유가 꼭 소비량의 증가를 보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자유가 낭비를 낳을 수도 있다.

 

asparagus About asparagus
asparagus 백합과 다년생 식물로 우리가 먹는 것은 4월 쯤 올라오는 새순. 아스파라거스에서 나오는 아미노산이 아스파라긴산. 우리에게는 숙취해소 음료로 알려졌지만 아스파라긴산은 숙취 뿐 아니라 피로도 풀어주고 체력도 강화해주는 건강식품. 비록 혼자서는 밍밍한 재료지만 베이컨, 토마토, 고기, 파스타 등과 어울리면 보기도 좋고 향도 좋고 무엇보다 몸에 좋은 아스파라거스처럼 어울림 속에서 듬직한 가치를 제공하는 새순이 되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