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영 라디오(public radio)의 정체

지금으로부터 십 여 년 전, 당시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어느 소도시에서 유학생 생활을 하고 있던 나는 우연히 라디오 방송국 하나를 알게 되었다.

따뜻한 3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운전 중 졸음을 쫓기 위해 평소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던 라디오를 무심코 켰다가 방송용 발성 훈련을 전혀 받지 않은, 거의 모노톤에 가까운 목소리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이상한 프로그램을 듣게 된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였지만 기독교 방송은 아니었고, 코미디는 아니었지만 웃음이 나왔고, 거창한 주제는 아니었지만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내용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건, 내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그 특이한 포맷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프로그램은 공영 라디오 세계에서는 전설적인 존재인 ‘This American Life’였고, 그 날 들었던 에피소드는 그 프로그램이 스타로 만들어준 작가 조너선 골드스틴이 직접 낭독한 자신의 단편, <아담과 이브>였다). 나의 미국 공영 라디오에 대한 중독은 그 날 오후, 그렇게 시작되었다.

PRI가 배급하는 ‘This American Life’ 의 진행자, 아이라 글래스(Ira Glass)

미국의 라디오 청취자들

매체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할 때 흔히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TV가 처음 등장했을 때 미국인들은 라디오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 내 TV의 보급과 비슷한 시점에 본격화된 미국 도시민들의 교외(suburb) 이주는 도시의 일터와 집을 오고가는 미국인들의 출퇴근 거리를 꾸준히 증가시켰고, (유럽이나 아시아와 달리 출퇴근이 대부분 자가용 승용차로 이루어지는 미국에서) 운전 중에 즐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체인 라디오는 오늘날도 두터운 청취자층을 유지하고 있다.

자,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고 가정해보자.

앞으로 30분에서 한 시간 가까이 무엇을 들으면서 운전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유행하는 음악을 듣고 싶으면 소위 “top 40 station”을 선택하면 된다. (미국의 대부분의 지역에는 빌보드 차트 상위에 올라있는 곡들을 집중적으로 틀어대는 톱40 방송국이 있다). 그런 방송국에서는 출근시간 대에 흔히 “morning zoo”라는 부르는 포맷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대개 2, 3명의 진행자가 나와서 요란하게 떠들면서 가벼운 뉴스와 농담을 늘어놓으며 유행가를 틀어대는 프로그램들이다. (시끄러운 정도를 가지고 비교하면, 조영남 최유라는 조용한 편에 속한다).

그런 방송국은 싫지만, 그렇다고 굳이 클래식 음악이나 특정 문화의(ethnic) 음악을 들으려는 것도 아니라면 다음 선택은 토크 라디오가 된다. 특히 이런 프로그램들은 심도있는 뉴스와 인터뷰를 전달하기 때문에 아침신문을 (보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면) 볼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출퇴근족들에게는 더욱 안성맞춤이다.

미국 토크 라디오의 1위, 러쉬 림보(Rush Limbaugh)

하지만, 여기에서 정치성향이 변수가 된다.

극우적이고 사실관계에서 자유로운(?) 토크 라디오를 듣고 싶은 사람들은 러쉬 림보(Rush Limbaugh)나 션 해니티(Sean Hannity)의 방송을 듣는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우리나라의 조갑제 정도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좌파들의 음모”를 이야기하면서 하루 몇 시간씩 떠들지만, 그렇다고 절대 우습게 볼 사람들이 아니다. 미국 전체 토크 라디오 청취자 숫자에서 각각 1, 3위를 하는 거물들이다. (2위가 NPR 전체의 간판 프로그램인 ‘All Things Considered’임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균형 잡힌 견해와 지적인 대화를 선호하는 청취자, 뉴욕포스트 보다는 뉴욕타임즈를 읽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공영 라디오 방송국으로 다이얼을 돌리게 된다.

공영 라디오는 NPR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공영 라디오를 흔히 NPR(National Public Radio)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건 오버코트를 “버버리”라고 부르거나, 셀로판 테이프를 “스카치 테이프”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다고 NPR 프로그램만 내보내는 방송국과 그렇지 않은 공영 라디오 방송국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미국의 공영 라디오 시스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공영 라디오’란 무엇인가?

엄밀하게 말하면 돈을 벌기 위한 상업방송이 아닌 모든 라디오가 공영 라디오, 즉 public radio이다. 미국에서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어김없이 라디오에 튀어나와 설교를 퍼붓는(!) 기독교 라디오 방송들도 공영 라디오의 기준에 부합하고, 학교나 지역사회가 운영하는 방송국들도 공영 라디오에 포함된다.

하지만 흔히 ‘NPR뉴스’를 송출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의미의 공영 라디오는 미국 공영방송공사(Corporation for Public Broadcasting)의 인증을 받은 방송국들을 지칭한다. 미국의 라디오 방송국들은 대개 지역별로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프로덕션 회사나 배급망을 통해 그 지역의 청취자들이 원하는 프로그램들을 돈을 주고 사오는 식으로 방송시간을 채운다. 그런 지역의 라디오 방송국들 중에서도 비영리이면서, 공개적인 모금행사(pledge drive)를 통해 운영비를 마련하는 방송국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라디오 방송국들에게 뉴스와 시사, 문화, 오락 등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파는 프로덕션 및 배급 회사들 중 하나가 NPR인 것이다.

워싱턴 DC에 있는 NPR 사옥

미국에는 NPR 외에도 아메리칸 퍼블릭 미디어(American Public Media), 퍼블릭 라디오 인터내셔널(Public Radio International)같은 회사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공급을 하거나, 각 지역 공영 라디오 방송국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전국 방송국에 배급/판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PR이 공영 라디오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간판 뉴스 프로그램인 ‘All Things Considered’와 ‘Morning Edition’ 때문이다. 각 지역 공영 라디오들이 모두 서로 다른 편성표를 가지고 있지만, 이 두 프로그램만큼은 거의 예외 없이 송출을 하며, 이 프로그램들은 언제나 “This is NPR: National Public Radio”라는 말로 사인오프를 하기 때문에 (몇 해 전부터는 브랜드 인지도 강화를 위해 “This is NPR”로 줄였다), 많은 청취자들은 자신이 듣는 공영 방송국의 이름이 NPR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NPR과 경쟁관계에 있는 아메리칸 퍼블릭 미디어나 퍼블릭 라디오 인터내셔널은 자신들의 프로그램이 단지 NPR과 같은 주파수를 탄다는 이유만으로 NPR 프로그램으로 잘못 알려져 있음을 발견하고, 자기 브랜드 관리에 착수해서 이제는 “APM”이나 “PRI”라는 짧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방송국에 팔리는 프로그램의 숫자나 인지도에서는 여전히 NPR에 훨씬 못 미친다.

몇 년 전에는 APM의 간판 프로그램인 ‘A Prairie Home Companion’의 진행자 개리슨 키일러가 NPR의 인기 퀴즈쇼에 초대손님으로 등장해서 “NPR은 혼자 잘하면 됐지, 왜 자꾸 우리를 끌어들여서 친한 척을 하느냐”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 라디오 방송국 주파수에서 두 프로그램을 모두 듣고 있는 청취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그 상황은 바로 위에서 설명한 미국의 공영 라디오 시스템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의 간판급 프로그램들은 무엇이며, 그 진행자는 어떤 사람들인가? 필라델피아에서 깊이 있는 돌직구 질문을 던지는 최고의 인터뷰어 테리 그로스Terry Gross의 ‘Fresh Air,’ 스토리텔링과 내러티브 저널리즘의 완결자인 아이라 글래스Ira Glass가 시카고에서 진행하는 ‘This American Life,’ 몇 년 전 혜성처럼 나타나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미국민들의 과학지식을 한 단계 높여주고 있는 뉴욕 퍼블릭 라디오의 ‘Radio Lab,’ MIT를 졸업하고 자동차 정비공이 된 형제가 보스턴에서 진행하는 자동차정비 프로그램 ‘Car Talk’ 등이 바로 그런 프로그램들이다.

이 프로그램들과 그 진행자들에 대해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하자.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미국인들이 지역별, 연령별로 어떤 하위문화로 구분되는지 들여다 보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Garlic About Garlic
어느 요리사의 조언처럼 "조리법 대로 만들었는데 맛이 없으면 마늘이 부족한 것." 김치처럼 마늘의 향이 강하게 튀어나오는 음식도 있지만, 대부분의 음식에서는 다양한 식재료 중의 하나로 녹아 들어가 전체의 맛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마늘, garlic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