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평소에 쓸데 없는 일은 가능한 한 안 하려 노력한다.
쓸데 없다 싶은 단순작업을 할 때엔 반드시 최소화 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엑셀에서 브이룩업 같은 기능을 발견하고 박수를 치며 기뻐하거나, 아래아 한글이나 포토숍에서 매크로를 돌린 후, 모니터에서 현란하게 벌어지는 자동 처리 과정을 지켜보며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낀다.

쓸데 없는 것을 없애고 집중하면 효율적이지만, 어느 순간 도그마에 빠져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꼰대가 되기도 한다. 효율성 쫓다가 오지랍 호기심을 잃기 때문이다. 오지랍 호기심은 다양성의 생태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다양성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존재의 기반이다. 나도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회사집회사집 심플 라이프의 결정체) 그래도 꼰대가 되는 건 싫어서 지방질 좀 채우기 위해 쓸데 없는 짓을 하기로 했다.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 고전이 아닌, 듣보잡 고전을 찾아 읽은 것이다. 평소 책은 소설조차 잘 읽지 않는 내가 읽은 귀한 책이다. 기쁘게도 쭉빵 미녀가 주인공이다. “너만 몰랐다. 무식 자랑 하냐?” 할 수도 있겠다. ‘듣보잡’은 무식한 ‘내 기준’임을 당당하게 밝힌다. 그러나, 만에 하나 당신에게도 듣보잡이었다면 무릎 꿇고 인사할 필요는 (절대) 없다. 기특하다는 좋아요 한 방으로 충분하다.

쭈엔끼에우1(구글에서 주워 온 끼에우 예상 이미지)

그래서 첫 책은, 두구두구둥~

<<쭈옌 끼에우>>. 베트남의 국민 문학이다.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이 책의 몇 구절을 외우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위키백과). 한글의 모음과 자음을 조합한 것이 맞나 싶게 낯선 이 단어의 뜻은 심청전과 같은 끼에우전이다. 주인공 이름이 투이끼에우로 재색 겸비했으나 박복한 미녀 되시겠다.

우리나라처럼 작자 미상? 아니다. 저자는 응우옌주. 18~19세기에 활약한 문인이다.(응우옌은 베트남인의 40%가 사용하는 성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김 씨가 20%인 것에 비하면 놀라운 숫자. 특히 응우옌은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로 실제 발음과 다른데. 응우옌의 실제 발음은 ‘신God조차도 발음할 수 없다’고 한다. 물론 이 신은 한국 신이다. 베트남 신은 잘 할 거다.)

쭈엔끼에우
<<쭈옌 끼에우>> 베트남 출간본 표지와 한국어판 표지

 

내가 읽은 책은 지식을만드는지식(지만지)에서 나온 천줄읽기로 55% 발췌한 책이다. 현재 판매되는 책은 지만지판이 유일하다.(지만지가 이런 희귀한 책을 많이 낸다.)

<<쭈옌 끼에우>>는 3254행으로 구성된 6·8조 장편 서사시다. 시가 판소리처럼 리드미컬해서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옹알거리게 된다. 줄거리는 미인박복, 효도최고, 고생고생, 권선징악, 나라충성, 해피엔딩. 스토리가 바리데기와 심청을 섞은 듯 비슷해보이지만, 이들이 판타지라면 쭈옌 끼에우는 다큐다.

내용을 좀 소개하겠다. 아래는 첫사랑 낌쫑이 끼에우를 꼬시는 장면. 낌쫑은 그야말로 엄친아, 명문가 인물 탁월이다.

오늘은 바람 불고 내일은 비가 올는지,
봄날에 이런 우연한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라.
사랑으로 미칠 것 같은 이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이 가슴 쓰라리면 누구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
하늘이 간절한 사랑을 막는다면,
이 내 청춘 쓸쓸히 보내게 되리라.
그대의 도량이 좁아 무관심하다 할지라도,
뒤쫓아 다닌 공이 아주 소용없지는 않을 것이리라!
– 본문 19쪽

읽다보면 왜 베트남 최고의 문학이라 칭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부분들이 있다. 캐릭터나 상황이 단편적이지 않고 문학적 표현 수준도 상당하다. 일부만 소개하면,

아! 가련한 한 떨기 동백꽃에
날아드는 벌이 오가는 길 훤히 꿰뚫고 있구나.
한 줄기 광란의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옥에 대한 아쉬움도, 향에 대한 가련함도 없더라.
– 끼에우가 순결을 잃는 장면, 39쪽

몸 둘 곳이 없는 끼에우 하는 말, “소첩은 길 잃은 제비라,
한 번 화살 맞아 굽은 나무만 보아도 겁이 나는구나.
막다른 골목에 들었으니 순종할 수밖에 없으나
사람을 안다는 것, 얼굴만 아는 것이지, 어찌 마음까지 알랴?”
– 억지로 결혼하게 된 끼에우, 알고보니 두 번째로 창루에 팔리게 된다. 83쪽

끼에우 울부짖는데, “지용(智勇)이 철철 넘치던 분이
소첩의 말을 듣고 이 지경이 되었구나!”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더니,
신음 소리 멈추곤 머리를 한쪽으로 떨구었네.
원기가 서로 통하다니 기이한 일이로다!
끼에우가 쓰러지니 뜨의 시신도 쓰러지더라.
– 남편의 죽음, 102쪽

<<쭈옌 끼에우>>의 주제가 응축되어 있는 건 이 마지막 문장인 것 같다.

하늘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니
재(才)와 명(命) 둘 다 타고날 수는 없으리라.
재주 있다고 재주를 너무 믿지 말 것이니,
재(才)와 재(災)는 같은 운(韻)이라.
사람은 업보를 지고 태어나는 것이니
하늘이 가깝다 멀다 탓하지 말지어다.
선(善)의 근원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마음 심(心) 자는 재주 재(才) 자 세 개와 맞먹는 것이라.

우리의 주인공 끼에우 미녀는 창루로 두 번 팔려가고, 첩이 되었다 납치 당해 노비가 되고, 남편이 죽어 과부도 된다. 결국 자살까지 시도한다. 안 좋은 건 다 겪는다고 보면 된다. 고전이라 하면 우화같은 느낌도 있고 전형적인 캐릭터를 예상하게 되는데, 묘사가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전개가 박진감이 넘쳐 쭉쭉 읽힌다.

<<쭈옌 끼에우>>는 베트남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에 견주며 자랑스워하는 작품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 작품 안에 자신의 운명이 전개되고 있다고 믿을 정도다. 심지어 ≪쭈옌 끼에우≫를 경전으로 간주하는 ‘끼에우 점’이 있을 정도다.(역자 안경환 인터뷰, 북레터 인텔리겐치아)  베트남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다면 이 책 먼저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나에게 듣보잡이라 해도 다른 이에겐 ‘고전 중의 고전’이다. 그만큼 내가 알고 경험한 세계는 좁고 한정되어 있다. 내가 인식할 수 있는 게 우주의 티끌만큼이나 될까? 세상은 넓고 존재하는 것은 무궁무진하다. 겸손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베트남 문학이고 서사시인 데다, 책 값도 착하지 않아 사 읽기가 아까우면 좋은 방법이 있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빌려 보면 된다. 없으면 신청해라. 도서관에서 책 사주고, 책이 도착하면 문자로 알람도 해준다. 그럼 완전 신삥을 내가 첫 번째로 읽을 수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 끝.

bacon About bacon
베이컨은 돼지 옆구리살이다. 베이컨의 품질은 지방질이 좌우한다. 옆구리살의 지방은 게으름이나 여유가 몸에 물질화한 거다. 문화도 여유에서 나왔다. 베이컨은 내 생각의 지방, 나란 돼지의 옆구리살을 저며내어 산업사회가 준 기술과 향신료에 버무린 고기다. 팍팍한 나를 풍요하고 여유롭게 만드는 먹을거리다. 아무 토핑이나 얹고 깔고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